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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로 살다

미친 바람의 춤/광풍매미의 기억

by 아일랜드고영미 2004. 10. 28.

 

태풍전야
마치 모든 것이 잠들어 버릴 만큼 고요했다
이상하리만치 한 점의 바람도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았던 그 후덥지근하고 습기 많던 어제는

시치미를 뚝 떼며 결국 오늘의 이 혼란을 만들고야 말았구나

2003 가을밤 추석하루 전이다
광풍매미는 온갖 틈을 기웃거리며 요란스런 굉음으로 사람들을 위협했다.

모진 비바람에 전기까지 끊어져 무방비상태인 우리들을 그저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짙은 암흑 속에서 나는 흔들리는 촛불을 마주한 채

몸뚱아리 하나쯤은 고스란히 삼키고도 남음직한 미친 바람의 춤을 공포속에서 보았다
어른이 되어도 바람이 이토록 무서울수 있다는걸 실감했다
언제라도 무기력한 거실유리창을 깨어 부수고 쏟아져 들어올 것 같은 창문의 떨림을,

그 막연한 불안함을 구기듯이 접고 나는 그래도 잠이라는것을 청해보았는데,

문상간 남편이 집을 비운 탓에 무서움은 몇 갑절 더했지만

웃기는 것은 그 와중에도 나는 잠을 잤다는 사실이다
아-- 인간의 나약함, 불감증이여.....

새벽- 아침하늘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검푸른 웃음을 보내고 있다
바닥을 긁어대는 거센 물살로 낙동강은 황톳빛으로 부글부글 끓는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여름이면 늘상 땅을 헤집으며 범람했던 홍수.
비닐하우스의 조용한 침잠을 나는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 어줍잖게 카메라에 담아본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농심을 알지도 못하는 내가 서둘러 '아픔'을 '기록'하겠다는 것인가

나는 아침운동을 가장한 채  쌀쌀할 만큼 시원한 바람을 등에 지고 잠겨버린 땅덩이를 보기 위해

새벽5시에 집을 나섰다.

대천천이 흐르는 다리난간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서 물바다를 구경중이다.
반쯤 나온 교통표지판이 여기가 도로였다는 것을 알려줄 뿐

내가 다니던 길이, 뛰어다니던 운동장이,  강변에 줄지은 수많은 비닐 하우스들이 정말로 물에 잠겼다.
농군인 듯한 중년의 남자 두어 명과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 한 분이 물위에 둥둥 떠다니는 비닐이며 스치로폴이며

잡다한 것들을 건져 올리고 있다.

쯧,...쯧.. 여름 다 보내고 이 무슨 지랄이여.....에휴...쯔쯔....
할머니는 못내 하늘이 원망스러운지 자꾸만 혀를 끌끌 찬다.
어제 추석이라고 집에 다니러온 아들에게 비닐 하우스 단단히 매어 놓으라 시키셨다며,

팔에 멍울이 생길 만큼 애써 고생했노라고..... 자꾸만 이야기 하셨다.

나는 강 뚝에 앉아 잠겨버린 농토와 길을-
대형트럭과 농기계들이 헐떡거리며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걸 지켜보고 있다.
멀리서 개들이 일제히 짖어댄다. 까마귀 울음소리도 들린다
문득, 싸한 바닷냄새가 코 끝에 와닿는다.

철썩거리며 파도소리도 들리는듯하다.
지리한 더위에도 즐거이 했던 농사가 올해도 흉년이란다.
뼈대만 앙상히 남은 하우스의 잔해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비닐들이 바람에 철썩~ 처얼썩~ 파도처럼 흔들린다.
여름내내 허리 굽혀 일한 할머니의 얼굴에서 송글송글 맺히던 소금땀이
비릿한 갯내음을 남기며 무심하게 바람에 날려간다.  

 

 

 태풍 '매미' 최대순간풍속 기록 경신/ 발생일 2003년 9월 6일  /  소멸일   2003년 9월 14일  

 

 

 

 

전국 143만가구 사상초유 정전사태

 

 

 

인명피해 사망 실종/ 135명

 

 

                                                                                            사진 /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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